기억은 반드시 유전자에만 저장될까?
전통적인 생물학에서는 기억과 정보 저장의 중심을 DNA, RNA 같은 유전물질로 간주해 왔다. 하지만 최근의 세포생물학 및 단백질학 연구들은 DNA 외부, 특히 단백질 복합체의 구조 그 자체가 기억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를 '단백질 기반 기억 저장 구조' 또는 '제2 기억 저장소'라고 부른다.
뉴런 내부의 기억 단백질 구조
신경세포는 시냅스에서 단기적 신호전달만이 아니라 장기적 구조 변화를 통해 학습과 기억을 유지한다. 이 과정에서 'PSD-95', 'CaMKII', 'PKMzeta' 같은 단백질 복합체가 시냅스 후막(post-synaptic density)에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며, 특정한 신호 패턴을 지속적으로 기억하는 물리적 플랫폼이 된다는 가설이 있다.
특히 PKMzeta는 지속적 활성화 상태로 남으며, 시냅스 강도를 장기적으로 조절하는 핵심 단백질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단순한 반응 요소가 아니라, 기억 그 자체를 형성하는 '물질화된 기억 구조'일 수 있다.
DNA 비의존 기억 실험 사례
2019년 UCLA 연구팀은 Aplysia(바다달팽이)의 감각 뉴런을 대상으로, 특정 학습 자극 후에도 DNA 복제와 RNA 전사 억제제를 주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냅스 변화가 유지된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유전자 발현 없이도 기억이 유지될 수 있다는 중요한 단서였다.
이 실험에서는 단백질 복합체가 이미 형성된 후, 외부 자극이 종료되어도 해당 구조가 분해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신경 신호를 지속적으로 증폭시키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기억이 단백질 배열 자체에 코드화되어 있다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단백질 배열과 정보 저장의 원리
기억 저장 단백질은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메커니즘을 따른다:
- 구조적 패턴화: 특정 자극에 따라 단백질 배열이 물리적으로 고정되며, 이후 자극 시 동일 반응 유도
- 인산화 상태 기억: 단백질의 포스페이트 부착 위치와 조합이 자극 정보를 '암호화'
이러한 배열은 수일, 수개월, 혹은 평생 동안 유지될 수 있으며, 신경세포의 에너지 공급 없이도 안정적인 신호 반응을 가능하게 한다.
비유전적 기억의 의미
DNA 외부에 기억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설은 기억을 물리적 코드로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기억이 단백질 구조에 존재한다면, 이 구조를 인위적으로 모사하거나 복제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나아가 뇌의 손상된 기억 회로를 복원하거나, 인공 신경망에 인간형 기억을 이식하는 실질적 기술적 근거가 될 수 있다.
응용 가능성과 윤리적 함의
만약 기억 단백질이 복제 가능하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혁신적 미래에 접근할 수 있다:
- 기억 백업 기술: 사고 전의 기억 단백질 패턴을 저장해 복원
- 지능 이식 실험: 학습된 단백질 배열을 다른 뉴런 집단에 주입
- 퇴행성 질환 치료: 알츠하이머 초기 기억 구조 유지 강화
하지만 동시에, 기억의 사유권, 윤리적 정체성, 단백질 조작의 부작용 등에 대한 논의도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
맺음말
기억은 더 이상 DNA와 뉴런 간 전기신호만의 산물이 아니다. 단백질 배열 그 자체가 기억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으며, 이는 생물학, 의학, 인공지능을 모두 잇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DNA 외부에 존재하는 제2의 기억 저장소는 이제 공상과학이 아닌, 탐구 가능한 과학적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