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없이 유전자를 조절할 수 있을까?
현대 생명과학은 유전자 조작과 발현 조절에 있어 대부분 화학적 자극이나 외부 유전물질 삽입에 의존해왔다. CRISPR, RNA 간섭, 항체 기반 조절 등 모두 화학적 매개체나 생화학 반응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최근, 세포 외부에서 전달되는 미세 전기 자극만으로도 유전자 발현을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실험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기술은 '무화학 유전체 제어(Electrogenomics)'라고 불리며, 차세대 유전체 조절 방식으로 주목받는다.
세포막 전위와 유전자 스위치
모든 세포는 세포막을 사이에 두고 전기적 구배(potential difference)를 형성하고 있다. 이 세포막 전위는 신경 전도나 심장 박동 같은 고속 생리 반응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유전자 발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막 전위의 변화는 특정 이온 채널을 통해 내부 pH, 칼슘 농도, 단백질 복합체 형성에 영향을 미치며, 그 결과 유전자 스위치가 켜지거나 꺼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해, 세포에 외부 전류를 인가하거나 국소 전압 자극을 주는 방식으로도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유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실험 결과가 축적되고 있다.
전기 자극 기반 유전자 조절 실험
MIT와 ETH Zurich 공동 연구팀은 2023년 인공적으로 재설계된 인간 세포주에 약 100~500mV 수준의 전기 자극을 주었을 때, 특정 전사 인자의 발현이 증가하는 것을 관찰했다. 이 자극은 1분 이내의 짧은 주기 동안 인가되었고, 화학물질이나 외부 단백질 삽입 없이도 전기 자극만으로 유전자 스위치가 작동함을 입증했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배양된 심근세포에 일정 주파수의 전류를 반복 인가했을 때, 근육 수축과 관련된 유전자들의 발현이 조절되는 현상이 보고되었다. 전기 자극 자체가 세포의 대사 리듬에 동기화되어 작동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점과 응용 가능성
무화학 유전체 기술은 다음과 같은 강점을 갖는다:
- 약물 없이 세포 반응을 조절할 수 있어 독성 우려가 낮다.
- 반복적이고 정밀한 제어가 가능하며, 자극 후 빠른 회복이 가능하다.
- 정확한 위치에만 국소 자극을 주어 표적 유전자만 활성화시킬 수 있다.
- 생체 내 존재하는 자연 전류와 연동하여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장기 이식, 세포 재프로그래밍, 암세포 제어, 신경재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 가능성이 높다.
기술적 과제
물론 이 기술은 아직 초기 단계이며, 다음과 같은 기술적 과제를 안고 있다:
- 세포별로 다른 전기 민감도에 따른 반응 편차
- 지속적인 전류 인가에 따른 세포막 손상 위험
- 전기 자극에 의해 유발되는 비특이적 단백질 변형
- 생체 조직 내 균일한 전기 분포의 어려움
하지만 나노전극 기술, 생체 적합형 전도성 고분자, 무선 전기 자극 시스템 등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로 개발되고 있다.
맺음말
유전자를 조절하는 방식은 이제 화학과 생화학을 넘어, 전기와 물리학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무화학 유전체 기술은 세포와 유전체 조절의 '비접촉', '무자극', '고정밀' 시대를 여는 서막이 될 수 있다. 향후 이 기술이 인체 내 응용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한다면, 우리는 신호 한 줄로 유전자를 켜고 끄는 시대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